책읽기 -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2
부제: 친일파 매국노 44인의 이야기 . 정운현지음. 인문서원. 2016.

6. 최승희(1911 ~ 1969)
1926년 일본 무용수 이시이 바쿠 문하 입문.
1929년 서울에서 최승희무용연구소 설립
1931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 안막(안필승)과 결혼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감. 미국, 유럽 등 세계 각국에서 공연.
1940년 귀국 후 메이지신궁, 아스쿠니신사 참배하고 무용보국을 맹세
해방까지 만주, 중국 일대에서 육해공군 촉탁으로 일본군 위문공연 지속
1945년 해방 후 친일파 비난 속에 월북

7. 박흥식(1903 ~ 1994)
1931년 종로 화신백화점, 1936년 화신연쇄점 설립. 전국 연쇄점 수 350개.
- 식산은행 3천만원 대부받아 사업 전개 매판적 상업자본이란 평가.
- 일본 상품 국내 살포로 일제 상품의 소비처로 전락.
1930년대 산업경제조사회, 시국대책조사회 조선 대표로 참여. 시국대응책에 자문역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배영동지회 상담역, 조선임전보국단 간부,
임전대책협의회 간부로 20만원 기부. 전시채권 가두판매.
학병 권유.
1942년 총독부의 지원으로 조선직물회사 동양방적 안양공장 접수
조선비행기공업(주) 설립, 일본군수산업 참여
해방 후 친일 경찰에게 10만원을 지원하며 반민특위 방해 활동.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 구속되었으나 무죄판결, 기업활동을 지속함.

8. 김활란(1899 ~1970)
- 친일과 친미를 오고 가며, 해방 후에도 권력에 붙어 승승장구한 전 이화여대 총장.
- 아마기 가쓰란으로 창씨개명
1936년 이화학당 부교장으로 총독부 주최 사회교화 간담회 참석.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 결성, 애국금차회(일제로부터 작위받은 자들의 부인 모임) 발기인.
1938년 YMCA 회장으로 기독 여자 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 모이자며 일본 YMCA 가맹 발표
1941년 이화여전 교장으로 강연과 방송에서 징병, 징용, 학병 촉구
해방 후 친미 인사로 변신, 미 군정으로부터 초대 이화여대 총장에 보임
이승만 정권에서 한미재단 이사
1960년 4.19 당시 이대생들의 시위 참가를 차단
1961년 5,16 직후 박정희의 특사로 미국에 가서 군사 반란의 정당성 홍보
9. 이근택(1865 ~ 1919)
- 삼형제가 친일 귀족, 자식에게 작위 상속. 대를 이은 친일파 가문.
1884년 무과 합격
1905년 군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찬성. 을사오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군중현) 중 하나.
1906년 을사조약 찬성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과 태극장을 받음
동생 이근상은 궁내부대신
형 이근호는 시종무관장
1910년 한일병합 때 합방은사금으로 훈1등 자작, 매국공채 5만을 받음, 중추원 고문으로 취임.
사후 장남 이창훈이 습작, 친일 단체에서 활동
동생은 훈2등 남작 작위받고 중추원 고문과 식산은행 감사를 지냈으며, 장남 이장훈이 습작.
형은 훈1등 남작 작위를 받고 아들 이동훈이 물려받음.
1979년 큰 증손자 이상우는 국립공주대 총장, 동생 이춘우는 공주대 물리학과 교수를 지냄

10. 한상룡(1880 ~ 1947)
- 이윤용, 이완용의 조카, 친일예속자본가의 전형
1903년 한성은행 총무로 취임
1910년 한성은행 전무 취체역(이사) 취임. 조선합방 공로자 은사공채 300만원으로 10배 증자.
1923년 두취(은행장)로 취임. 1928년 조선식산은행과 합병으로 물러남.
1927년 중추원 참의.
1929년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 통감부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 동상 제작.
이토기념회 조선 측 발기인 총대
1931년 일제 침약 전쟁 옹호하는 강연과 담화 개최
1933년 장충단에 시부사와(다이이치 은행 최고책임자) 기념비 건립
경성국방의회 발기인,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감사,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
1935년 총독부 청사 홀에 데라우치 마시타케 전 총독 동상 건립
1936년 사이토 마코토 전 총독 추도회 개최
1937년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 국방헌금.
애국금차회 창립하여 노리개, 금붙이 헌납 운동
1939년 총독부 청사 홀에 사이토 마코토 전 총독 동상 건립
1943년 징병제 찬양 및 동참 촉구
1944년 일본 귀족원 의원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도 받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