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책읽기 -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1
    카테고리 없음 2023. 9. 2. 14:03

    부제: 친일파 매국노 44인의 이야기 .  정운현지음. 인문서원. 2016.

    역사에서 현재를 배운다.

    정운현 작가는 머리말에서 한국 사회에서 친일문제는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사라고 한다.

    이 책을 보면 권력기관과 언론, 재계의 친일파들이 어떤 친일 행위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변절은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알 수 있다.

    독일은 전범을 철저하게 정리하고 과거를 반성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친일파들을 관리로 그대로 등용했다.

    44인 중 15인을 소개한다.

    친일파의 행적을 보며 현재를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1. 김인승

       친일파 1호. 친일파의 선구자. 

       1869년  함북 경흥의 관가에 근무했으나, 수령과 의견 충돌 끝에 관직을 그만두고 러시아로 감.

       1875년  일본인 다케후지를 만나 일본외무성의 고문이 되어 만주 지역 및 조선 지역의 탐색 보고를 함.

       1976년 2월 강화도 조약 체결을 위해 구로다 일행과 강화도에 도착. 공문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수정하는 역할을 함

                              조선 관리 설득 방책 18개항 작성

     

       - 1996년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서 자료 입수하여 밝힘(구양근 성신여대 총장 역임)

     

     

     

    2. 우범선(1856 ~ 1903)

       1885년 민비시해사건 당시 훈련대 대장으로 병력 동원 및 시신 처리.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인과 결혼.  1903년 일본에서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 당했다.

      큰아들 우장춘은 한국으로 와 농업연구를 했으며, 둘째 아들은 호적상 일본인이 되었다.

     

     

     

     

     

    3. 배정자(1870 ~ 1952)

       조선의 마타하리라 불리운다.

       1870년 김해 아전 배지홍의 딸로 태어남. 배지홍은 1873년 대원군 실각으로 대구감영에서 처형.

       모친과 유랑생활을 하다 밀양의 관기가 되었으나 도망나와 양산 통도사에 있다가 체포됨.

       밀양부사 정병하는 일본인을 소개하고 15세에 일본인 밀정 마쓰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감.

       이토 히로부미의 하녀 겸 양녀가 된 배정자는 스파이 교육을 받게 됨.

     

      1894년 조선으로 와 고종에게 접근하여 기밀을 일본에 넘김.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한국통감이 되자 오빠 배국태는 한성판윤(서울시장), 동생은 경무감독관(경찰청장)이 됨.

      1914년 헌병대 촉탁으로 시베리아, 만주에서 군사 첩자 활동

      1920년 만주지역 친일단체 '보민회'(독립운동가 체호를 위한 무장 첩보단체) 창설. 고문 담당.

      1922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촉탁. 600평의 토지 증여받음.

      여성 100여 명을 군인위문대로 남양군도로 돈을 받고 송출.

     

     

     

    4. 윤치호(1865 ~ 1945)

       1881년 17세에 신사유람단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됨

       이후 상해, 미국에서 유학을 함.

       1912년 테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는데 1915년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석방됨.

       일제의 '조선독립 불능론' '대세순응주의'를 표방하며 일제의 문화정치 선전.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총독부 시국강연반 연사로 전국 순회 강연

       1938년 육군 특별지원병제는 '내선일체에 합당한 조치'로 환영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상무 이사로 황국신민화 실천

       1943년 조선인 학도 출진 촉구 - '조선 학도들이 내지 동포들과 어깨를 겨루어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영광스런 길이 열렸다'

       1945년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

     

     

     

     

    5. 노덕술(1899~1968)

       울산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한 후, 1920년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하고 경찰이 되었다. 

       1929년 비밀결사조직 '혁조회'를 탄압하여 김규직 외 1명이 사망하고, 관계자 2~3명이 복역하였다.

       '부산 동래교보 동맹휴학 사건' 학생들의 사찰과 검거에 앞섰다.

       '조선인 일본 유학생 강연회' 강연자들을 검거했다.

       1932년 'ML당' 김제학을 검거 고문 벌금형을 받게 했다.

       1934년 평남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승진.  화물차를 징발하여 군수품 수송에 제공.

       독립운동가들에게 일본인 형사보다 더 악랄한 고문을 가했다.  

      1948년 해방 후 반민특위 요원에 대한 암살 시도.

     

      노덕술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대통령 이승만은 친일 경찰 세력을 정권의 한 축으로 삼아 노덕술 석방 요청.

      1949년 친일 경찰 반민특위 습격(6.6 사건) 이후 무죄선고.

      1950년 9.28서울수복 당시 제1사단 헌병대장.

      이후 부산 및 서울 육군범죄수사단 대장 역임.

      1960년 4.19 혁명 직후 제5대 민의원 선거 낙선.

     

         - 노덕술을 통해 해방 후 친일파가 그대로 경찰, 군인 지도자로 앉아있는 모습을 본다.

     

      

       

       

       

     

     

      

      

     

     

     

     

      

                 

     

     

     

Designed by Tistory.